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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 비비안 투가 말하는 커리어의 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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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원지기
- @nenyacat

요즘 커리어 담론을 보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성장, 확장, 스케일, 다음 단계. 특히 IT 업계에서는 이 단어들이 거의 미덕처럼 소비된다. 더 큰 서비스, 더 많은 트래픽, 더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곧 더 나은 개발자라는 전제가 자연스럽게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전제가 정말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 흐름을 대중적으로 정리해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비비안 투(Vivian Tu)다. 그녀는 JP모건에서 트레이더로 일했던 금융권 출신으로, 현재는 'Your Rich BFF'라는 이름으로 개인 재무와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흔히 떠올리는 금융 인플루언서와 달리, 그녀의 메시지는 투자 기법이나 단기적인 돈 버는 방법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에 가깝다. 왜 우리는 이렇게 일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은 우리의 삶에서 어디까지를 차지해야 하는가.
일은 정체성이 아니라 도구다
비비안 투가 일관되게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일은 정체성이 아니라 도구라는 것이다. 커리어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에 가깝다. 그녀는 "좋은 커리어란 더 많은 책임을 떠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택권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흔히 말하는 승진이나 타이틀, 더 어려운 일을 맡는 것이 반드시 더 나은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선택이 개인의 시간, 에너지, 정신적 여유를 얼마나 소모하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
그녀가 특히 경계하는 단어가 '성장'이다. 성장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긍정적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책임 증가, 업무 범위 확장, 보상 없는 헌신을 정당화하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보상하겠다", "배울 기회가 많다", "빠르게 성장하는 조직이다" 같은 말들이 반복될수록, 리스크는 개인에게 전가되고 보상은 불확실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비비안 투는 이런 구조를 아주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성장이 누구의 비용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개발자 환경에 대입해보면
이 시점을 한국 개발자 환경에 대입해보면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 특히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포함한 IT 직군에서는 '플랫폼 서비스 경험'이나 '대규모 트래픽 처리 경험'이 일종의 계급처럼 작동한다. 어떤 회사에서 일했는지가 실력의 대리 지표가 되고, 그 서열에서 내려오는 선택은 종종 퇴보나 실패로 해석된다. 하지만 비비안 투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커리어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그녀는 연봉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최고 연봉을 목표로 삼는 순간, 삶 전체가 그 숫자에 종속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충분한 연봉'이다. 생활을 유지하고, 저축과 투자가 가능하며, 미래의 선택권을 조금씩 늘릴 수 있는 수준의 연봉. 이 기준을 넘어서면, 추가로 올라가는 연봉이 실제 삶의 만족도를 얼마나 바꾸는지는 다시 계산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출퇴근 시간, 업무 강도, 책임 범위, 감정 노동 같은 요소들은 숫자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연봉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개발자들에게 이 부분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회사일수록 업무 강도는 높고, 이동 시간은 길며, 암묵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환경에서는 요구사항이 명확하고 역할이 단순하며, 일과 삶의 경계가 분명한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커리어'인지는 단순히 회사 이름이나 기술 스택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일을 영웅적으로 하지 말라
비비안 투는 "일을 영웅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한다. 맡은 일을 잘하되, 자기 삶을 잠식할 정도로 자신을 갈아 넣지 말라는 의미다. 이 말은 개발자에게 특히 유효하다. 실력이 있는 개발자일수록, 요구사항 이상의 결과를 내는 데 익숙해지고, 그게 당연한 기준이 되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그 기준은 곧 더 많은 업무와 더 높은 기대치로 돌아온다. 보상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이는 개인에게 불리한 게임이 된다.
그녀의 투자관 역시 극단적이지 않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기 위한 탈출구로서의 투자가 아니라, 삶의 완충 장치로서의 투자를 이야기한다. 일을 계속하더라도, 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만드는 것. 그게 그녀가 말하는 재정적 안정이다. 이 관점에서는 안정적인 캐시플로우와 지속 가능한 노동이 오히려 장기 투자에 더 적합한 환경이 된다.
성공은 더 넓은 선택지를 확보하는 것
결국 비비안 투가 말하는 성공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선택지를 확보하는 데 가깝다. 어떤 일을 할지, 얼마나 할지, 언제 멈출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 한국 개발자 사회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성장 서사와는 다소 다른 방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번아웃과 이직이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이 관점이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커리어는 계속 위로만 올라가야 하는 사다리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옆으로 이동할 수도 있고, 잠시 멈출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맞는 높이에서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선택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기준으로 내려졌느냐는 점이다. 비비안 투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더 열심히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묻는다. 지금의 선택이 정말 당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있는지 말이다.